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처음도 自我아요, 마지막도 自我다.
수단도 自我요, 목적도 自我다. 견성하지 못하고서
大我를 말함은 미망이요,위선일뿐이다.
철저한 자기 본위의 생활은
대인 관계에 있어서 극히 비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비정한 자기 본위의 생활에 틈이 생기거나
흠결이 생기면, 수도는 끝장이 나고 만다.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게 비정해야만
견성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전후좌우 상하고찰해 보아도
견성은 끝내 혼돈된 자아로부터 출발하여
조화된 자아에서 멈춰질 수밖에 없다.
견성은 끝내 자아의 분방한 연역에서
적료한 자아로 귀납되어야 한다.
비정 속에서 비정을 씹으면서도
끝내 비정을 낳지 않으려는 몸부림...
생명을 걸고 생명을 찾으려는 비정한 영혼의 편력이
바로 선객들의 생태다.
진실로 이타적이기 위해서는
진실로 이기적이어야 할뿐이다,
모순의 극한에는 조화가 있기 때문일까.
납자는 철저하게 욕망의 포로가 되어 전전긍긍한다.
세속인들이야 감히 엄두도 못내겠지만
생사 문제까지 놓아 버리고
부처가 되겠다는 대욕에 사로잡혀,
심산유곡을 배회하면서 면벽불이 되어
스스로가 정신과 육체에서 고혈을
착취하는 고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無慾은 大慾이기 때문일까
선객은
인간은 끝내 견성하지 않으면 안될 苦集의 존재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苦의 땅 위에 苦의 集을 짓고
苦로써 울타리를 치고
苦의 옷을 입고
苦를 먹고
苦의 멍에를 쓰고
苦에 포용된 채
苦의 조임을 받아가면서도
苦를 넘어서려는 의지만을 붙들고 살아 간다.
만약 이 의지를 놓친다면 그 때는 ,
生의 모독자가 되고 배반자가 된 채
암흑의 종말을 고할 뿐이라는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운명적으로 붙들 수밖에 없다.
선객은 숙명의 소산이 아니라 운명의 소조이다.
숙명은 자기 이전에 던져진 의지이자 주어진 질서여서
생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것이지만 ,
운명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자유로이 선택한 후천적인 현실이다.
그래서 숙명은 필연이지만, 운명은 당위요,
숙명이 불변이라면, 운명은 가변이요,
숙명이 한계성이라면,운명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현재의 나는 숙명의 객체이지만,운명의 주체이다.
숙명은 자기 부재의 과거가 관장했지만
운명은 자기 실재의 현재가
그리고 자신이 관장하는 것이어서
운명을 창조하고 개조할 수 있는 소지는
殞命직전까지 무한히 열려져 있다.
숙명의 필연성을 인식하면,
운명의 당위성을 절감하게 된다.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숙명적인 것은
피하려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이해해야하며,
운명적인 것은 붙잡고 사랑해야 할 뿐이다.
苦集의 표상 같은 누더기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선객이야말로
견성의 문턱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내 운명은 타기될 것이 아니라 파지되어야 함은
선객의 금욕 생활이 극한에 이를수록 절감되는 상황때문이다.
지허스님의 선방일기 "禪客의 운명"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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