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반님께 드리는 글
윤거사
지금 창밖으로 비가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도반님께서도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계시겠지요.
많이 황망하시겠습니다. 갑작스런 병환으로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육신 때문에 낙담과 절망감이 넘치실 것 같습니다. 세상의 허무함도 밀려오겠지요.
며칠 동안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를... 그러나 방편지혜를 갖추지 못한 저로써는 여법한 말로써 용기와 희망을 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냥 평소에 생각해오던 생로병사에 대한 관념과 불법을 공부하며 느끼고 있는 행복과 불행에 대한 소견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늘에서 내린 비는 이제 또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겠지요. 어떤 비는 산에 내려 맑은 시내가 되어 흐를 것이고, 어떤 비는 하수도에 들어 갈 것입니다. 이러나저러나 비가 강이 되어 흐르다 바다에 모여들 것입니다. 그리곤 또 하늘로 올라가 여행을 하다가 비가 되어 내리겠지요. 윤회의 삶은 무정의 물에게도 예외는 없지요.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그대로 우리네 인생입니다. 부딪히고 꺾이고,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급하게 쉬지 않고 흘러 흘러만 갑니다. 하얀 뭉개구름을 비추이기도 하고 밝은 태양을, 은은한 달빛을 반사하기도 합니다. 항상함이 없이 계속 변해만 가는 일체 만물의 행이 무상함을 빗물은 알고 내리는 것일까요?
도반님은 지금 어디에 와 계십니까?
바로 지금까지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볼 시점에 도착하신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오셨지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까지 오르셨고, 더 큰 꿈을 위해 그 자리를 버리고 창업의 꿈을 펼치셨습니다.
그러나 계속된 과로와 스트레스, 미래에 대한 부담감으로 몸이 끝내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셨지요.
20일 만에 눈 뜬 낯 선 병실에서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은 한쪽 팔다리를 느꼈을 때의 절망감에 저의 마음도 무척이나 아프답니다. 전생의 도반으로 함께 공부하다가 오랜 생이 지나고 최근에서야 인터넷에서 다시 만나 함께 공부를 시작한 나의 전생도반님의 갑작스런 병환에 몹시 놀라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도반님!
지금의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단지 불행의 초입을 뜻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미처 만나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는 고통에 지금의 심정처럼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현실은 많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의 현실을 여법하게 받아들이고 장애를 넘어서 더 큰 공덕의 장으로 나가는 열쇠가 됩니다.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들은 결코 올바른 현실보기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무엇이 바로 보는 것일까요?
우리는 몸에 일어나는 통증 때문에 괴로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통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병원을 찾습니다. 그러나 통증의 진정한 의미는 괴로움이 아닙니다. 만약 통증이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몸의 이상을 알지 못해 결국은 회복 불능의 상태를 맞게 됩니다. 통증은 상처를 보호하여 더 큰 손상을 막기 위한 몸의 보호장치입니다.
허리에 이상이 생기면 통증이 일어나 몸의 주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주위 근육을 경직시켜 척추관절을 보호하고, 통증으로 움직임을 제한 시켜 더 큰 손상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통증의 본래 목적입니다. 괴로움을 주는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통증의 의미를 바로 알게 되면 통증에게 감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도반님처럼 한쪽 사지가 마비가 온 장애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마음의 보호장치인 것입니다.
현대의학으로도 완전한 치료가 어려운 이런 장애가 어떻게 마음의 보호장치가 될 것인가? 통증의 본래 의미를 파악하듯이 이제 저와 함께 마음이 하는 말을 잘 들어보십시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신체적 큰 질환이나 다른 사회, 경제적 난관을 만나게 되면 그저 전생, 현생의 업의 과보일 뿐입니다. 고통과 좌절로 세상에 대한 원망과 암담한 미래만이 보일 뿐이죠. 거기서 좋은 의미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자는 다릅니다. 삼보에 귀의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불자에게는 업이 단지 업이 아니며 불행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왜 그럴 것인가?
마음은 기다려 왔습니다. 무엇을?
여법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때를 기다려 온 것입니다.
무엇을 여법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인가?
진정으로 중요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나온 생을 되돌아봅시다. 우리 세속인이 보통으로 추구하는 행복은 경제적 안정을 기반으로 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안정된 또는 보장받는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취를 이루었다해서 정말로 행복한 것일까요?
꿈결같은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흐르고 맙니다. 죽을 때까지 불행 없이 행복하게만 살았다면 죽는 순간의 고통은 더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아까운 행복과 영원한 작별을 해야 하니 말이죠.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아야 하루 밤의 꿈과 다를 바 없고, 이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지어놓은 업장따라 가야 할 뿐, 내 재산, 내 가족 어느 것 하나 함께 하지 못합니다. 세속의 행복이라고 추구해 온 것이 허망한 그림자 일 뿐이고 어느 것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없지요. 집착의 고통과 잃는 아픔만이 따라올 뿐입니다.
마음은 비상이 걸렸습니다.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에 올라고 부처님 법도 만났으니 여유롭게 불법을 공부하고 보시하는 공덕도 지으며 성불의 길로 내닫기를 바라고 있었지요.
그런데 세속의 더 큰 의미를 찾기 위해 창업이라는 길로 들어서자, 그로 인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창업에 들여야 하니, 아까운 시간이 마구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도반님께서는 내년에 50세가 되신다고 하셨지요. 창업을 하면 50, 60세... 언제까지 그 일에 매여야 할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해서 중생과 법계를 위한 원을 세우고 그 성취를 위한 자신의 소임이 아니라, 단지 세속적 성취를 위해 내달리기에는 짧은 인생이 너무 아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과감하게 제동을 건 것입니다. 진지하고 여법하게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자면서 말이죠. 진정 이렇게 시간과 정열을 쏟아부어 내달리는 길이 옳은 길인가?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전생에 불교 수행자로서, 이제 다시 어렵게 사람 몸 받고,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 법 다시 만났는데, 남은 생을 세속적인 행복 추구에 더욱 매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몸을 병상에 뉘여 놓고 여법하게 지나온 삶을 돌아보라 말합니다. 과연 남은 생을 투자할 만한가?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
이런 큰 수업료를 내면서까지 마음은 절실하게 인생을 진지하게 이야기 하자 합니다.
불법의 시작은 제행무상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와 행이 항상하지 못하고 무상하게 업따라 흘러갑니다. 그 제행무상을 절실하게 느껴보자고 마음이 애타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마음은 우리 몸의 통증처럼 더 큰 불행을 막기 위해 지금의 장애를 일으켰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단지 통증만 느끼면 통증이 싫고 괴로운 존재이지만, 그 의미를 알면 감사한 존재이지요. 그렇듯이 이번 장애가 그 자체만 바라보면 원통스러운 일인 것 같지만 다가올 더 큰, 또는 다른 장애를 막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행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마음은 말합니다.
이번 기회가 윤회와 업장을 소멸하고 불성광명을 되찾을 참으로 소중한 공덕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창업이라는 일에 매여 덧없이 세월을 보낼 건강한 나날들 보다는 몸의 장애로 인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오로지 부처님만 바라보고 한마음 모아 자성불을 깨울 수 있는 어느 때 보다 절실하고 소중한 인연의 시간이 될 것임을 간절히 전하고자 합니다. 또 그러한 수행공덕으로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몸의 건강도 되찾고 참다운 불자로 다시 태어나자고 합니다.
다른 분의 경우를 잠깐 이야기 해보죠. 예전에 승진행님께 들은 이야기 인데, 서울대 식품공학과 교수로 김치냉장고를 처음 발명하신 전재근박사의 경우입니다. 초대석에 출연하셔서 들은 이야기라고 하시네요.
그분은 서른두 살엔가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서울대 전임으로 계시다가 학생들과 부산으로 여행 갔다가 회를 잘못 드셔서 전신 마비가 오셨대요. 해서 3년인가를 꼼짝없이 드러누워 있었는데...
한없이 참담했겠죠. 올망졸망한 아이들과 고생하는 아내. 고생하면서 유학하고 돌아와 학문적으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드러누워 있는 자신.
그때 말씀이. “참담했지만, 아비 없이 자랄 아이들 생각에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고 합니다.
해서 그 때 드러누워서 한 것이, 반야심경 외우기... 죽고 살기로 그것만 외웠는데...
기적처럼 일어났답니다. 그리고 학교로 돌아가셨다는 군요.
그리고 또 한차례. 50이 막 넘어 한 차례 더 다른 병으로 드러눕게 되셨답니다. 그때 또 일이년 쉬었는데, 앉아서 할 수 있는 기계고치는 것을 취미로 했다고 해요. 해서 지금은 공대교수보다 기계를 더 잘 고친다고 합니다. 그리곤 김치냉장고를 발명하셨어요.
이런 이야기는 수없이 많습니다. 도반님의 마음은 도반님께도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답니다.
신체적 장애는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일어 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피로 다시 일어서는 것도 특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로 인해서 더욱 절실하게 불성에 다가가고 정말로 진지하게 부처님을 알게 되고 그 가피를 받아쓰게 되며, 참다운 인생행로를 잡아 남은 인생여정을 사라지지 않을 진정 가치 있는 공덕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나타난 현재의 상황은 올바른 세상보기가 아닙니다. 마음의 말에 귀를 귀울여 보세요.
제행무상을 느끼고, 더 큰 불행을 막고, 참다웁게 불자의 길을 가자고 마음이 말합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정적인 생각은 이제 멈추십시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몸과 마음만 더 괴로워 질 뿐입니다.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을 돌리세요.
힘을 내십시오. 다시 건강하게 일어서실 수 있습니다.
염불하십시오. 일념으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십시오. 또는 보리방편문을 외우세요.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무상하며, 오로지 우주에 충만하고 실재하는 것은 영원한 안락과 능력과 참다운 행복을 빠짐없이 본래로 갖추어진 불성” 이라는 생각에 온 마음을 집중시키고, 오로지 염불을 하거나 보리방편문을 외우세요.
처음에는 물론 잘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건강할 때 보다는 더욱 절실하게 수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구요. 눈을 뜨면 하루 종일 매달리세요. 잠시 놓치면 ‘아차’ 하고 알아차리고 또 계속 수행을 지어나가세요. 앉으나 서나, 누우나 걸으나, 밥을 먹으면서도 화장실에 앉아있을 때도, 무엇을 하던 중이라도, “내가 이 수행을 놓치면 다시 일어날 수 없다. 난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다.”하는 절절한 심정으로 수행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마치 절벽에 매달린 사람이 그 손을 꽉 잡듯이 그렇게 수행을 잡으세요.
그래서 꿈속에서도 놓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알게 됩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참회의 눈물이 저절로 넘쳐 오른다는 것을. 진정 내 삶을 되돌아보고 참다운 참회가 절실하게 솟아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나면 또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지금의 장애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참다운 참회와 감사의 마음을 찾게 되면, 이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여법한 발원을 세우게 됩니다. 남은 생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으로 귀중한 마니보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자 합니다. 마음이, 도반님의 자성불이 그렇게 가자고 애타게 부르고 있습니다.
도반님, 나의 전생도반님, 그리고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 나의 도반님.
일어서세요. 눈을 부릅 뜨고 주먹을 불끈 쥐고 어두운 생각의 마구니를 저 멀리 쫓아 버리세요. 할 수 있습니다. 도반님은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반님, 도반님, 나의 도반님.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자비하신 부처님! 우리 도반님께 힘을 주세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주시고 힘차게 수행의 길로 내달릴 원력을 주시옵소서.
전생 수행의 공덕으로 이번 생에 사람의 몸 다시 받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 장한 불자입니다. 이 불자께서 부처님의 화엄세계로 공덕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피를 내려 주시옵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도반님! 지금은 한거정처에 머물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위급한 상황이 재발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약물치료를 해야 하고, 또 재활치료를 병행해야 합니다. 그런 의학적 치료를 소흘히 하지 마시고 수행과 병행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빨리 그리고 놀랍게 회복이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의 도움없이도 응급상황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가 되면 일, 이주 정도 요양할 수 있는 곳으로 제주도 자성원을 추천합니다. 마침 오늘 choi님께서 일주일간 자성원에서 보낸 휴가 겸 수행일기를 올려주셨네요.
물과 공기가 맑은 제주도, 그리고 유기농 채소를 직접 가꾸어 공양하는 깨끗한 먹거리가 있는 자성원은 이곳에서 청화큰스님께서 육조단경을 정리하시었고, 맑은 부처님의 기운이 흐르는 곳이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입니다.
그 곳에서 맑은 기운을 한껏 받으며 요양과 수행을 한다면 몸과 마음이 더욱 튼실해지실 것입니다.
부디 이 인연의 의미를 깊이깊이 참구하여 보시고 어서 빨리 수행의 길로 들어서십시오. 그리고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수행자가 되세요.
저는 믿고 또 믿습니다. 다시 예전처럼 건강을 되찾을 뿐 아니라 수행의 큰 공덕도 지을 것입니다.
도반님 도반님 나의 도반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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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당님의 격려의 글
윤거사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삶의 고통이나 어려움은 정말 회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나를 여물게 하고 나를 위대한 인물로 만든다해도
차라리 훌륭하게 살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냥저냥 살다가도 좋으니까
정말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고통인 것 같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당했을 때,
아무리 주변에서 큰 일을 당한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의 고통은 내 것에 비하면 하잖아 보입니다.
내 몸이 다쳤는데, 내가 이렇게 큰 불행에 빠졌는데
다른 사람의 고통쯤이야 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문제만 해결된다면
그 어떤 욕심도 안부리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직은 저도 제가 당한 불행이 완전히 감사하고 고마울 정도로 수행이 된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절이라도 좀 하고, 염불이라도 좀 하는 날엔
그런 불행이 곧 나를 철들게 했고, 나를 사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 생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내 잘못도 아닌데,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되고
왜 나만 불행해야 되는가에 대해
속으로는 막 분노가 치밀고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스승님과 선배들이 보여주었듯이
번뇌가 곧 보리이고 불행이 곧 행복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아니, 믿기지 않는다해도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저는 수행자로 살아가려 합니다.
윤거사님의 글을 보실 도반님.
도반님도 저처럼 오기 한 번 부려보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절대로 이대로는 쓰러질 수 없다는,
절대로 이대로 인생을 끝낼 수 없다는 그런 오기 말입니다.
그 오기의 바탕이 불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번에 도반님같은 경우를 당한 후배한테
당당하게 도반님의 경험담을 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머지 않아 도반님은 그렇게 되실 것입니다.
힘 내시기를...!
무진당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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