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백두대간 단독종주기(구룡령~조침령)
구룡령- 조침령 백두대간 종주기
1. 일시: 2003. 8.24( 일요일)
2. 산행시간 : 06:20-15:55(9시간 35분)
3. 대원 : 이은상(단독 종주)
<종주 동기>
23일 한계령- 미시령 구간 1박2일 종주예정이 되어 회사에서 10시에 일찍 내려왔다. 몸은 종주에 부풀어 팽팽히 긴장하고 마음 속으로 긴장감을 즐기면서 한가지씩 산행 준비를 하였다. 수중전 준비를 위하여 옷가지를 비닐에 꼬깃꼬깃 꾸리고 1박 하면서 대원들과 소주한잔 할 생각으로 슈퍼를 돌고 돌아 팩 소주를 몇 개 사고 돼지고기 찌개 하려고 고추장,양파,감자 등을 챙기고 있는데, 크릉 크릉 핸드폰 메시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메시지를 받아보니 종주 연기 메시지가 대장님한테서 왔다. 팽팽히 긴장한 몸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피휴…… 갑자기 맥이 없어지면서 몸이 공기 빠진 공처럼 쭈글 거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중단하고 쇼파에 벌렁 누웠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과 같은 허전함만 가슴속에 쌓였다. 옆에서 마눌씨는 참 현명한 결정했다면서 진행측을 고맙게 여긴다. 비도 오고 내일도 많은 비가 내리니 경포 호수나 한바퀴 뛰고 뒷산이나 돌아오라 한다. 댓구도 안하고 나 혼자 계획을 세웠다. 내일 아침 새벽 구룡령-조침령 구간을 단독 종주하기로… 마눌씨 에게 도시락 부탁하고 카페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뒤져보다 잠을 청했다.
집에서- 구룡령(04:45-06:20)
04:00 자명종 소리에 일어났다. 아침밥을 찾아 꾸역꾸역 몸 속에 집어넣고 어제 준비해 준 도시락이며 간식이며 챙겨서 베낭을 꾸렸다. 하루종일 비가 온다고 하니 수중전 할 것을 단단히 각오하고 그믐달님 종주하면서 미끌어져 옷을 다 버렸다는 종주기를 읽고 혹시하며 아이젠 까지 준비하였다. 05:00시 주문진을 통과하는데 검문을 당하였다. 대간 가는데 대한민국의 아무 이상이 없는 떳떳한 남아라는 것을 신고하고 가는 셈이 되었다. 나올 때 “비도 온다는데 집에서 쉬지 그러냐” 고 말리는 마눌씨 말이 뒤에 자꾸 남는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저기압이라 그런지 몸이 찌뿌둥 하며 기가 잘 모이지 않는다. 어제 대간 종주 연기에 너무 김이 빠져서인지 썩 좋은 컨디션은 아닌 것 같다. 구룡령에 도착하니 6:15분 비옷을 입고 구룡령 생태 터널을 사진 찍으면서 첫발을 내딪었다.(사진1)
구령령- 갈전곡봉(06:20-08:05)
06:20 생태길 너머 백두대간 설명 팻말이 서있다. 그 위로 조그마한 소로 길이 나 있고 생태터널 만든 콘크리트 벽쪽에 붙어 대간 길이 보인다. 나무가 간밤의 비에 젖어 바지를 적시고 있다. 그나마 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이다. 비가 많이 내려 씻겨서 인지 길도 미끄럽지 않다. 혼자서 절대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 조심해서 가자고 몇 번이나 다짐한다. 혼자 오기 전 얼마나 많은 쓸데 없는 걱정을 하였는지 모른다. 혹시 짐승이나 달려들지 않을지, 길을 잘못 들어 헤매지 않을지, 가지고간 물이 모자라지나 않을지, 벌이나 곤충에 쏘이지 않을지, 혼자 가서 겁이 나지나 않을지, 이런 모든 생각들이 산에 들어오는 순간 모두다 날아가 벼렸다. 대간 길에 접어드니 마음이 편안해지며 그저 정겨운 길을 만난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07:20 한시간 정도 걸었을까? 1121봉 지나면서 대관령 산악회 꼬리표를 처음 보았다.( 사진2)
무척이나 반가웠다. 조금 지나니 커다란 고목에 하얗게 버섯이 핀 나무를 만났다. 정말 장관이었다 (사진3-4).
바쁜 걸음 멈추고 사진 한장 찍었다. 20분쯤 걸으니 치밭골령이 나왔다(사진5). 순간 갈전곡봉으로 착각하였다. 치밭골령에서 물 한모음 먹고 사진한장 찍고 생각해 보니 갈전곡봉이 아닌 것 같았다. 예정시간보다 빠른 것 같고 다시 오르기 시작하여 15분정도 오르니 봉우리 정상이 나오면서 이정표가 서 있었다. 갈전곡봉!!! 구룡령 3.4 km 쇠나드리 12.7 km. 아! 이곳이 갈전곡봉이었다. 사진한장 찍고 비가 오지 않아 비옷을 벗고 출발하였다.(사진6-7)
갈전곡봉-왕승골(08:05-09:30)
08:05 갈전곡봉에서 출발하니 대관령 산악회 꼬리표가 눈앞에 다정히 다가선다. 난 대관령 산악회 꼬리표를 나름대로 좋게 평가하고있다. 우선 그 색깔이 백의민족이 즐겨 입는 하얀 바탕에 자연을 사랑하는 녹색글씨가 마음에 든다. 민족의 색깔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에 흠뻑 베어있는 꼬리표 이며 그것은 다른 꼬리표와는 달리 천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다른 꼬리표는 울긋불긋한 색깔의 비닐에 아니면 비닐 코팅해서 매달아 놓아 환경오염을 시키고있다. 그러나 우리 산악회 꼬리표는 까실한 천으로 되어 있어 바람이 불고 세월이 흐르면서 씨줄 날줄이 바람에 세월에 하나하나 흩어져 천지사방으로 우리의 마음을 뿌리며 그만 자연으로 돌아가 버린다. 또 우리 산악회의 꼬리표를 좋아하는 이유는 많이 달려있지 않다. 남발하지 않고 꼭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것이다. 너무 요긴한 곳에서 하나의 길잡이 등불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걸으면서 난 그대로 그믐달님 보다 행복하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났다. 길도 매끄럽지 않고 비도 오지않고 ‘아,오늘 산행하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걷기 시작하여 20분쯤 가니 싸리나무 숲이 길을 막는다. 키가 커서 어깨위로 물을 뿌려 놓는다. 소매와 어깨가 물에 젖기 시작한다. 비옷을 입고 간 것을 잘못했다라는 생각이 든다.
09:00 이름 모를 봉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약 한시간 정도 걸었는데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비옷을 입고 출발하여 왕승골 삼거리에 도착하니 이정표가 나를 반긴다. 그러나 이정표가 애매하게 되어있다. 갈전곡봉 3.3 km, 윗쪽으로는 단풍군락단지, 쇠나드리 옛 조침령, 조침령으로 되어있고 단풍군락단지에 4.2 km로 써있고 조침령 4 km로 써 있다. 쇠나드리는 대간을 벋어나 1.2 km 인지 1.5 km인지 된다고 확실치 않지만 써 있었다. 갈전곡봉에는 쇠나드리 12.7 km로 써있었는데 이정표야 어째건 간에 나는 가야만 한다.
왕승골->1040봉(09:30-11:00)
09:30 왕승골에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10분쯤 오르는데 왼쪽다리 무릎쪽에서 뜨끔하며 이상이 왔다. 다리가 좀 뻐근해진다. 이곳 저곳 주물러 보고 만져보았지만 특별하게 아픈 곳은 없다. 근육이 놀란 모양이라 하고 정상에 올라가 맛사지를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정상에 와 맛사지를 하였다. 얼음찜질 맛사지다. 물병을 꽁꽁 얼려 왔기 때문에 반절 정도 녹아있어 아주 차가웠다. 그 병으로 한 5분정도 아픈 부위를 맛사지를 하였다. 조금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첫발을 아래로 내딧는데 찌릿하게 통증이 왔다. 걱정이 앞서기 시작하였다. 이제 3시간 밖에 오지 않았는데 포기할 수도 없고 얼음 찜질이 근육을 더 긴장시켰는가 보다. 일단 종주하기로 독하게 마음먹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떼면서 아프지 않는 걸음을 찾기 시작했다. 우선은 평지나 오르막길은 조금 괜찮았다. 내리막길에서 발을 디딜 때 발바닥이 수평이 된 것 보다 앞으로 숙여지면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서 왼발 뒷꿈치로 딪고 발이 수평이 되도록하며 오른발에 무게중심을 많이 주면서 걸었다. 걸을만 하였다. 그러나 경사가 심한 곳에서는 통증이 왔지만 절름 거리면서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순간 대원들이 없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든든하신 전응규님, 용과장, 이쁜 쑨~, 최혜원, 차영옥, 최문규, 산돌이, 그믐달, 바다새, 등등. 내가 알고 있는 대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한 이럴 때 대장님의 침 한방을 맞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그러나 부질없는 생각이며 현재 나는 혼자 종주 대간 길에 있을 뿐이었다.
10:00 정도 되니까 비는 굵어지기 시작하였다. 평지와 오르막길은 평소 걷는 것과 같았으나 내리막길은 절뚝거리면서 한발한발 나아갔다. 10시 30분 정도 되는데 앞에서 사람소리가 났다. 조침령에서 구룡령으로 대간 종주하는 사람들이다. 반가웠다. 4명이 모여 앉아 비가 쏟아지는데 식사을 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5분 정도 가니 일행들이 오고 있었다. 모두 32명이라 한다. 미친놈들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침령에서 5시 출발했다 한다. 5시간 반정도 걸릴 것 같다. 앞으로 내가 가야 할 시간이다. 아니 어쩌면 더 시간이 걸릴 지 모른다. 앞에 커다란 봉우리를 한참 오르니 11시가 되어서 1040봉에 올랐다. 1040봉 큰 나무 밑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비는 억세게 내리고 있었다. 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찬물에 밥을 말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시원했을 텐데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찬물에 말은 밥이 식도를 따라 넘어갈 때 싸늘한 한기를 느꼈다. 뜨거운 라면 국물 생각이 절로 났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 생각하고 빗물이 모자챙으로 부터 떨어지는 도시락을 다 먹었다. 발이 얼마나 더 지탱해줄지 모르겠다.
1040봉-단풍군락단지(11:000~13:00)
11:05 1040봉을 출발하였다. 경사가 급하였다. 15분정도 고통의시간을 보내면서 내려왔다. 아마 이 부분에 다달아서 그믐달님이 미끄러 졌을 거란 생각을 하며 조심조심 내려왔다.발이 많이 아프다. ”아픔”을 생각해 보았다. 세상에는 아픔이 여러가지 인 것 같다. 내가 격는 아픔은 고통을 수반하는 아픔이다. 또 다른 아픔은 애환을 수반하는 아픔이 있다. 그렇다. 이 구룡령과 조침령구간은 애환을 간직한 마의태자의 발자취가 골골히 묻어있는 구간이라 한다. 아닌 인제군은 마의태자와 유서 깊은 곳이다.
먼 옛날 서기 936년 경순왕(이름: 김부)은 신라의 국세가 기울자 항복하고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만다. 태자인 마의태자는 이에 불복하고 개골산(금강산)으로 숨어 들어 나라의 부흥을 꿈꾸게 되는데 곳곳에서 군사를 모으고 훈련을 하며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숨어서 군사훈련을 하였다. 지금 지나온 왕승골 이란 곳도 아마 마의태자(왕)가 군사를 기르며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왕승골이라 하며 점봉산 밑 귀둔이란 명칭도 귀한 군대(즉 왕의 군대)가 주둔하는곳이라 하여 귀둔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하며 필례약수도 처음에는 난리를 피해 들어와 살던 곳이라 하여 이를 필예(必曳) 부르는것이 피래라 부르게 되었고, 1916년까지는 피래라 부르고 있었으나 그 이후 언제인가부터 필례라 하였다. 하니 구룡령에서 한계령까지는 마의태자의 꿈이 깃든 곳인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또한 상남에 있는 금부리는 마의태자의 아버지인 경순왕을 모셔 살던 김씨의 부족 마을인가 한다. 금부리는 경순왕의 이름 김부에서 온 것이라는 추측이다. 한계령의 한계리는 마의태자가 겨울에 고개를 넘는데 마의태자를 춥게 한 곳이라 하여 한계리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듯이 구룡령와 조침령 구간은 마의태자의 애환의 꿈이 서려있는 구간이다.
“아픔의 꿈” 이루지 못하는 애환의 꿈이기에 고통은 없지만 고통보다 더한 깊은 아픔이 베인 곳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겪고있는 고통은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간 마의태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 이다. 라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1시간정도 열심히 걸으니(12:00) 몸에 열기가 나서 그런지 발의 통증이 좀 덜한 것 같다. 이제 조금 살 것 같다. 마지막 역주행 종주팀 후미와 만나 인사를 하고 나니 이젠 다시 이 구간에는 만날 사람도 없고 기대할 것이 아무도 없는 그야말로 외톨이가 된 것 같았다. 비는 더욱 기세를 가하며 내리고 있었다. 안개도 자욱이 끼었다. 그래 ‘비야 오너라’ 비라도 오니까 이몸은 외롭지 않다. ‘안개야 끼어라 우리 셋이 같이 종주하자’ 하며 마음속으로 생각하니 비오는 것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비도 안개도 나도 가야만 한다. 난 조침령까지 만 가면 된다. 비도 올만큼 오다 가겠지 안개도 낄 만큼 끼다가 가겠지 역시 비도 안개도 나도 나그네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조금 더 가니 955봉 이라는 네모난 팻말이 나무에 걸려있으며 쇠나드리에 대한 거리가 40분이라고 써졌다가 약 2시간으로 수정되어져 있었다. 2시간이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3시30분이면 조침령에 도착되겠지 하는 계산이 나온다. 그로 부터 30분쯤 더 걸었다. 단풍나무 군락지대 였다. 단풍나무들이 키가 나보다 훨씬 커 머리 위에서 잎파리들이 비를 받아내고 있었다. 가파른 능선길을 치고 올라갔다. 단풍나무군락 정상인듯하다.(1080고지) 여기서 잠깐 마눌씨가 타준 꿀차를 한모음 마시면서 호흡을 조절하는데 차맛이 꿀맛이었다.(꿀차니까)
단풍나무 군락- 조침령(13:00~15:55)
13:00 이제 대관령 산악회 꼬리표도 보기 힘들었다. 아마 꼬리표 다는 선발대도 지겨운 산행길인가 보다. 정상에서 내려다 보니 가파른 내리막이다. 발걸음을 자연히 반보 한보, 절뚝 한보의 박자에 맞추어 지겹게 내려갔다. 앞으로 올라갈 것을 생각하며 내리막길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배낭에 가득진 채 한참을 내려왔는데 다시 올라가는 줄 알았는데 15분쯤 계속 완만한 능선길이었다, 아 이 길이 좀더 길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능선길 가는 길에 비는 계속 내렸으나 안개는 서서히 걷쳤다. 안개가 갈 길을 가장 빨리 가는 것 같다. 한참 가는데 산새 한 마리가 나뭇잎 밑에서 포드득 날아갔다. 아마 비를 피하고 있다가 마친놈 발자국에 놀라 날아갔나 보다. 저새도 간신히 비 피할 곳을 찾아 쉬고 있는데 내가 괜히 방해가 된 것 같아 비맞은 내 모습을 생각하며 그 새가 안쓰러웠다. “미안하다.새야, 내가 못쓸 짓을 했구나” 하고 날아간 새한테 미안한 마음을 전하였다. 한참 내려가다보니 길가에 바위가 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 바위에 걸터앉아 물 한모음을 마?첸駭?. 3시30분쯤 도착할수 있을까? 아니면 4시30분 까지 목표를 잡아야 하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무 이정표도 없고 간간이 이름 모를 백두대간 종주 꼬리표만 길을 안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최악에 4시30분 까지다’ 하며 마음을 늦추었다. 다시 출발하고 30분쯤 걸으니 커다란 소나무가 서있는 안부에 와 있었다. 다시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큰일이었다. 앞을 보니 커다란 봉우리가 앞을 막고 서있었다. 봉우리를 올라서 조금 내려서니 쇠나드리인 것과 같은 갈림길이 나온다, 시계를 보니 3시가 조금 못 되었다. 힘이 솟는다. 조금 올라치니 봉우리에 돌이 몇 개 있으며 쉬기에 좋았다. 벌써 점심 먹은지가 4시간이 흘렀다. 배낭을 벗어놓고 간식을 찾았다. 조그만 햄 쏘시지와 복숭아 하나를 먹고 그래 늦어야 4시30분이야 하며 길을 제촉하였다.(15:00) 언뜻 길 왼편으로 저 밑에서 공사현장이 보였다. 길을 내고 있으며 큰 장비가 서있는 것이었다. 속으로 다 온 것 같았다. 능선길을 따라 걸으니 다시 길은 숲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숲속을 걷고 걸어 40분쯤 오니 손에 다을듯이 왼쪽에 큰길이 보였다. ‘아아 다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10분쯤 가니 큰 길로 내려서게 되었다. 2주전에 왔던 조침령 길이었다. 조금 올라가니 조침령 이정표가 흐르는 안개에 덮여 서 있었다. 이렇게 돌덩이가 반가울데가! 카메라를 꺼내서 내 배낭을 올려놓고 사진한장을 찍었다. 사진을 찍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주인공은 배낭으로 하고?(사진 8-9)
무사히 종주을 마쳤다. 이제 비도 다 왔는지 뜸해지고 안개도 서서히 사라지고 안개와 비와 나는 이곳에서 한 구간 종주를 끝내기로 하고 서로 헤어졌다. 내 아픈 발만 남겨놓고.
추신 : 그믐달님보다 나은 종주길이다는 생각 전적으로 취소다.
조침령내력 : 마을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면 이고개는 주막이 하나 있었는데 재를 넘는 나그네들이 밤을 부둥켜안고 이곳에서 자고 갔다고 하여 옛날에는 밤부둥령이라 하였으나(정감가는 옛이름인 것 같다) 공병여단장이 도로를 개설하면서 조침령이라 하였다함.
쇠나드리 내역 : 이곳쇠니드리에 오려면 큰 물 세개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새가 쇠로 변하면서 쇠나드리라함. 소가 나들던 곳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주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