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생각들

[스크랩] 소쇄원 이야기 일부

계방산방 2006. 7. 25. 11:29
나. 소쇄원에 담긴 정신

① 유가(儒家)의 정신
소쇄원 건립의 핵심사상은 추악하고 더러운 세속적 권력을 멀리하고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양산보가 개인적으로 과거에 합격하였다가 낙방한 사실과 그의 스승 조광조에 대한 권력의 배신이 중요한 원인이라고 봅니다.
조광조는 조선 사림의 맥을 이은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김굉필에게 학문하는 방법을 배워 도(道)를 행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겼습니다. 행동은 예법에 따르고 말은 때에 맞도록 해서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간 후 도학(道學)을 숭상하고 인심을 바로잡고 성현(聖賢)을 본받아 지치(至治)를 일으켜야 한다고 반복하여 중종에게 아뢰니 그를 중용하기 시작합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1518년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인재를 뽑았으며 [소학]과 향약(鄕約)으로 인재를 육성하고 풍속을 교화하고자 하니 그의 뜻이 널리 펼쳐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급하게 서두르고, 건의하고 시행하면서 날카로운 기운을 너무 드러내고 또한 너무 급진적으로 시행을 하였습니다. 나이도 젊어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시대의 추세에 따라 분란을 일으키는 일에 끼어드는 경우도 생겨나 오래된 신하들로 이루어진 훈구파(勳舊派)의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이를 기묘년에 일어난 사화라 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하며 유배 후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당대의 선비였던 김식(金湜), 김구(金絿), 기준(奇遵) 등도 유배 후 죽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또한 현량과에 합격하였다가 삭탈당한 사람이 28명이나 되었습니다. 물론 양산보도 여기에 포함되겠죠.
양산보는 요즘 나이로 따지면 아직 어린 10대였지만 그가 사림의 정통 학맥을 이어받은 자부심은 대단하였을 것이며 또한 현량과 천거까지 받았으니 그에 대한 스승의 사랑이 지극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사화로 인해 능주로 유배가는 스승을 모시고 따라간 것을 보아 양산보가 스승을 섬기는 마음 또한 어떠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양산보는 도학을 근본으로 삼는 사림의 정통을 이어받았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여 정통 성리학을 추구하는 자세를 견지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그가 중국 북송의 성리학자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 등을 글방의 좌우에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고 함에서 알 수 있습니다.

양산보가 소쇄원을 짓는데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은 면앙정 송순(宋純)(1493-1583)입니다. 자는 수초(守初), 호(號)는 면앙정(俛仰亭)이며 담양군 봉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면앙정은 중종 14년(1519) 별시문과에 급제한 이후 개성유수(開城留守)를 거쳐 1550년에 이조참판이 되었습니다. 선조 2년(1569)에는 대사헌이 되었으며,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렀습니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와 면앙정을 짓고 많은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양성하였습니다. 그의 정치 생활은 후덕한 인품과 원만한 대인관계 때문에 비교적 순탄하였다고 합니다.
면앙정이 양산보에게 소쇄원 건립에 도움을 준 이유는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지만 이들이 서로 인척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양산보의 아버지는 병조참판 송복천(宋福川)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송순은 송복천의 손자이므로 송순과 양산보는 내외종 형제가 됩니다.

소쇄원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한 유학자가 있으니 바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입니다. 김인후는 집이 있던 장성에서 화순의 최산두(崔山斗) 선생에게 배우러 갈 때는 늘 소쇄원에 쉬어 갔다고 합니다. 중종 35년(1540)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독서당에서 공부하였으며 부모를 모시기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갑니다. 명종 즉위년(1545) 을사사화(乙巳史禍)가 일어나자 그 다음해 고향 장성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당쟁에 휘말리지 않는 식견과 탁월한 글씨 그리고 천문·지리·의약·산수 등에도 능통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39세가 되던 1548년 “소쇄원48영”이란 시를 지어 소쇄원의 완성된 모습을 제대로 그려내고 있으며 지금도 소쇄원의 본 모습을 알기 위해 가장 먼저 찾는 자료입니다.

이외에도 고봉 기대승,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등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이 이곳을 찾아 지친 심신을 달래고 뛰어난 경치를 노래한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② 도가(道家)의 정신
양산보는 사림파과 훈구파의 대결에서 무참하게 패배를 당한 사림의 모습에서 세속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대신 자기 수양에 몰두하고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는 삶을 추구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즐겨 읽었다는 점이 그 증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유학이 아닌 도가사상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도연명이 살았던 시절은 유교와 함께 불교와 도교가 함께 성행하던 시기였습니다. 또한 신흥 군벌(軍閥)들이 등장하여 각축을 펼치던 어수선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세상이 싫어 홀연히 [귀거래사]를 남기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도연명의 모습에서 양산보는 위안을 삼았을 것이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연명이 이렇게 물러나는 사상적인 토대는 “통달하면 더불어 나아가 천하를 구제하고, 막히면 홀로 그 몸을 착하게 산다(達則兼善天下, 窮則獨善其身)”는 유가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러난 도연명에게는 도가사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현실적 이익과 욕망 그 추악한 세계에서 발버둥 칠 것이 아니라 무위자연이라고 하는 참 세상에 몸을 맡기고 유유자적했던 것입니다. 이러니 소쇄원에는 성리학적 정통성 이외 자연과 함께하는 도가사상이 은연중에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도가의 사상 즉 노자나 장자의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변하는 질서를 나타내며 인위적인 조작이 개입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노자나 장자의 자연은 사람이나 제3의 인물에 의한 간섭이나 영향을 받지 않는 스스로 생성하고 운동하는 것입니다. 자연이라는 것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으며,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특히 장자는 인간 중심적 생각을 비판하면서 한편으로 오늘날 우리가 생태계라고 말하고 있는 자연 속의 모든 생명체들이 평등하다고 하였습니다. 장자의 나비의 꿈 이야기가 이런 입장을 적절하게 말해줍니다. 한번은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습니다. 가벼이 날아다니는 나비는 유유자적을 즐기면서 자신이 장자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틀림없는 장자 자신이라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장자는 사람이 외부에 있는 대상인 자연을 볼 때 주관적으로 좋고 나쁜 판단을 하는 감정이 있다고 보고 이를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그래서 장자는 사람이 개미, 잡초, 기왓장 등 동·식물뿐만 아니라 무생물까지도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도 자연이라는 거대한 존재의 연속성 속에서 각기 다르게 나타내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기 여겼을지 모릅니다.

어린 나이에 거대한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스승을 잃고 낙향한 양산보에겐 사림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유학의 정신이 도도히 흐르면서도 자연에 대한 도가적 이해를 통한 유유자적한 삶이 함께 깃들여 있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출처 :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
글쓴이 : 幽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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