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자료/백두대간자료

다시보는 전설이 어린 화방재 피재 산행기~

계방산방 2006. 4. 11. 11:19
   2004년 3월1일 숙제하면서 쓴 종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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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백두대간 10구간(화방재~피재)종주기 

백두대간 10구간 종주기(화방재~피재)
일시 : 2004. 3. 1 (8:45~16:23) 구간 : 화방재~수리봉~만항재~함백산~은대봉`금대봉~비단봉~천의봉~피재
인원 : 이은상, 황수연, 김태영, 정동빈 총 4명

(화방재-수리봉) (8:45~9:15)
화방재 일명 꽃방석 고개에는 따스한 햇살과 봄을 재촉하는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다. 새벽 5시 30분에 강릉에서 출발하여 산지기님, 김태영님을 만나 화방재에 도착하니 8시15분 간단히 아침을 먹고 8시45분에 화방재를 출발 하였다. 산지기님이 선두에 서고 나, 김태영님, 정동빈님께서 후미에 따라가고 있었다. 초입부터 경사가 제법 있었다. 어제 날씨가 따뜻해서 인지 대간길이 얼었다 풀리면서 어제 지나간 발자국과 노루이나 사슴으로 보이는 짐승 발자국이 깊이 박혀 얼어 있었다. 산으로 들어서니 제법 날씨가 싸늘하여 모자로 귀를 덮고 산행 하였다. 대간길에는 키가 큰 물푸레 나무와 참나무들이 어울려 오는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3주동안 놀아서인지 뒷다리가 땡겨 오며 급한 경사의 능선은 팽팽한 긴장감을 다리에 전해주며 힘든 산행길을 예고해 주는 것 같았다.

산지기님은 벌써 저만큼 앞서가고 있다 ‘빨리 다리가 풀려야 한텐데’ 하면서 페이스를 잃지 않으려고 내 발걸음 대로 걸어나갔다. 30분쯤 올라 왔을까 봉우리 하나로 넘어섰다. 수리봉 이었다. 수리봉 지나면서 경사는 완만해지고 다리에 긴장감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김태영님이 앞서가고 있었고 산지기님이 사라져 버려 3명이서 걸어가고 있었다.

(수리봉-만항재) (9:15~10:05)
경사가 완만해지고 산죽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오면서 다리는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였다. 멀리 함백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상 뾰족한 부분만 남기고는 대부분이 커다란 송신 시설로 산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그 밑에는 고원적응 훈련지 건물이 아득하게 보였다. 조금더 올라가니 무덤2기가 사이 좋게 누워있었으며 10분쯤 더 가니 군사시설인지 국가시설물이 나왔다. 시설물 철책을 따라 올라오니 만항재가 보였다. 10시 해발 1313m 재로 우리나라 포장도로가 난 가장 높은 고개로 기억된다. 그러나 후덕한 함백산의 산자락에 누워 있어 높지만 높이 느껴지지 않는 평안함을 주고 있었다. 한시간 넘게 걸어서 좀 쉬었으면 하는데 산지기님은 우리 오기를 기다리다가 자기 다리 튼튼한 줄만 알고 남의 다리 생각 안 해주며 계속 함백산을 향해 내달린다. 만항재에서 함백산 쪽으로 조금 올라오니 함백산 안내 팻말(지형도)이 있고 그 위에 무덤 한기가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누워있었다. 올라가는 산지기님 불러 새워 잠깐 쉬어 가자 청하였다. 귤과 양갱이 초코렛을 나누어 먹고 시간을 보니 지도에 나와 있는 시간보다 약 20분 정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만항재-함백산) (10:05~11:05)
10시 5분에 함백산 을 바라보며 산길로 접어들었다. 약간 경사길이 나오지만 처음 수리봉 오르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그만 고개하나 넘으니 오를만하고 넓은 산 자락이 나오면서 옆에 만항재 에서 올라오는 시멘트 포장 길과 만나게 되었다. 멀리 함 백산의 위풍스러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월을 잡아매고 딱 버티어 서서 산객 을 맞이하고 있었다. 30분 정도 걸어왔을까? 선배 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영동고속도로 진부 지점부터 서울 방향으로 차가 밀려 꼼작하지 못한다면 수원까지 가는 국도나 지방도로 를 알려 달라 한다. 옛 고속도로가 남아있는 길을 알려주며 ‘아 오는 서울 올라가는 것이 장난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에 산지기님 일행 귀경걱정이 앞선다. 앞에서 도로공사를 하는지 대간 길이 도로에 끊기면서 대간길 이어지는 길에 1~2m 높이의 절개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10분쯤 올라가니 송전 철탑 세워놓은 자리가 나왔다. 지금은 철거되고 용접기로 불어낸 송전 철탑의 끊긴 자국과 커다란 시멘트로 만든 터 자리가 그래도 남겨져 있었다. 피재에서 새벽 4시에 왔다는 일행을 만나서 인사를 나누며 우리의 앞으로 간 길을 가름해보니 6시간 정도 되는 것 같다.

너덜지대가 나오면서 경사가 급해지며 아이의 팔뚝 두께 만큼 굵은 밧줄이 산객 을 맞이하고 있었다. 날씨가 포근해서 언 땅이 녹고 있었다. 녹은 황토 흙은 그대고 너덜지대의 돌 위에 황토색 발자국을 남기고 노란 물을 들이고 있었다. 한참을 너덜지대를 통과하고 급경사 오르막길을 오르니 이젠 굵은 밧줄도 끝이 났다. ‘아 이제는 거의 다 오는가 보다’ 속으로 생각했는데 웬 걸 이 높은 산이 산객 을 그냥 호락호락하게 올려 주지를 않는다. 다시 너덜지대와 경사의 밧줄길이 한차례 더 나오고서야 키 작은 나무들이 나오면서 우리를 함백산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이제 고원 체육시설의 트랙도 눈 아래 보이고 있었다. 빨간 색으로 트랙이 장식이 되어 있었지만 고지대 적응 훈련만 하고 동계 훈련은 하지 않는지 사람 한 사람 보이지 않고 썰렁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나무의 키는 우리 키보다 낮아지고 조금 돌아가니 그나마 보이지 않고 산 정상에 올라섰다. 함백산(咸白山)1572.9m !!!

정상에는 사람 키 만큼 큰 커다란 돌에 함백산이라고 한자로 시원스런 필체로 새겨져 있었다. 바로 밑에는 커다란 송신 시설이 자리잡고 있어 고요한 산의 정취를 앗아가 버리고 산속의 공업단지속에 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정상에서 산주인 산신께 3배 방문 인사를 드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태형 님은 정상 주 한 잔 하자면서 정겨운 산소주 한 병을 내 놓는다. 산지기님이 섹시하게 생긴 황금빛 술잔을 꺼내 맛있는 소주 한잔씩 나누고 주위 경관을 감상하였다. 남쪽으로 만항재가 보이고 태백산이 보이며 그 뒤로 백두대간 능선인 깃대배기봉과 구룡산이 장쾌하게 뻗어 있었으며 앞으로 가야 할 북쪽에는 중함백산, 은대봉, 금대봉, 비단봉, 매봉산(천의봉)이 오른쪽으로 둥근 원을 그리며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함백산은 1572.9m로 남한에서 6번째로 높은 산이지만 그 이름은 태백산에 가려 산객의 발길이 뜸하였다. 바로 뒤에 보이는 태백산(1566m)은 많이 알려지고 민족의 영산이라 하여 많은 산객 들이 찾고 기가 많이 모인다 하여 道家들이 찾아와 기도와 수련을 하기 위하여 일년 내내 성시를 이루는 산이다. 이런 산을 옆에 두고 함백산은 시기와 질투도 잊은 채 본래의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모든 욕망을 털어내고 정진하는 스님의 모습이라 할까! 그래서 옛 고승 자장율사님은 산의 후덕하고 得道하는 마음을 아는지 함백산 자락에 유명하고 커다란 가람 정암사를 품게 하였으며 또 하나의 선물로 부처님 정골사리를 가진 적멸보궁 수마노탑을 함백산의 정암사에 안겨 주었다. 산을 닮아 사리사욕을 버리고 본래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산과 고승의 마음의 교감이 있었으리라!

잠시 발길을 멈추고 정암사의 얼킨 전설을 생각해 보았다. 그 옛날 1300여 년 전 자장율사 는 말년에 평창에 수다사(水多寺)를 짓고 그곳에서 거주하였는데 어느날 꿈속에서 북대에서 본 서역승이 나타났다 한다. 그리고 “내일 그대를 대 송정 에서 만나리라”하고 사라졌다. 이튿날 자장스님은 대 송정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 문수보살님은 태백산 갈반지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며 자취를 감추어 태백산에 들어와 갈반지를 찾는데 어느 나무 밑에서 큰 구렁이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곳이 갈반지라고 말하고 구렁이를 쫒고 그곳에 석남사(지금 정암사)를 짓고 문수보살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는데 어느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은 노인이 찾아와 자장스님을 보기를 청하였다. 시자는 “당신이 누구 시길래 스님을 뵈려 하느냐” 며 물었으나 “너의 스승에게 그대로 고하기만 하라.” 고하여 시자는 자장스님께 말씀 드리니 자장은 “미친 사람인가 보다”라며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시자는 밖에 나와 노인에게 욕을 하며 쫒아 내었다. 그러자 노인은 “돌아가리라 돌아 가리라, 我相 (자아에 대한 집착)이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 하며 삼태기를 쏟으니 삼태기 안의 죽은 강아지가 사자보좌(獅子寶座)로 변하여 노인은 그것을 타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노인이 곧 문수보살이었으며 시자는 놀라 급히 자장스님께 그 사실을 알렸고 자장은 급히 의관을 갖추고 밖으로 나왔으나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다. 문수보살을 찾아 나선 자장은 끝내 땅에 떨어져서 숨졌다고 한다. 옛 고승도 한 순간의 아상에 사로잡혀 道가 흐려지니 道 이루는 것은 어렵고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함백산-싸리재(두문동재) (11:05~13:05)
함백산을 내려와 철판이 깔린 헬기 장을 지나 주목나무 군락지에 접어들었다. 이곳 주목나무 군락지는 볼쌍스러운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산객의 발길을 가로 막고 있었다. 태백산의 주목 군락지는 이렇게 볼쌍스럽게 관리하지 않고 주목 한 주, 한 주에 보호 망을 치고 관리하고 있었는데 함백산은 관리가 좀 소홀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이곳에서 부터는 제법 대간 길에 눈이 쌓여 있었으며 일부는 녹아서 다시 얼어붙어 어느 곳은 빙판을 이루어 길이 미끄러웠다. 조심한다고 내려 갔지만 순간의 방심으로 인하여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차! 조심해야 하는건데 한순간의 실수가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니 산에서는 한발 한발 신경을 써서 걸어야 한다. 다행히 부상은 없었으며 중함백산으로 발길을 빨리 하였다. 이곳에서는 자작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었다. 자작나무도 고로쇠나무와 같이 물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자작나무 물은 고로쇠나무 물 보다 색깔도 진하지만 단맛이 더 난다고 김태형님께서 알려주신다. 벌써 전남 광양의 호남정맥 끝 자락 백운산에서는 고로쇠 물을 받아 판매한다고 하니 봄이 성큼 다가온 것이 느껴진다.

중함백산을 지나 (11:40) 은대봉으로 걸음은 재촉하였다. 제2쉼터라 는 표시판이 나오고 한 20분 정도 더 가니 제 1쉼터가 나왔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정암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었으며 우리는 은대봉 봉우리를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멀리보기에는 우뚝 솟은 봉우리지만 막상 올라치기 시작하면 산의 높이는 많이 낮아지는 것 같이 쉽게 봉우리가 나오곤 하였다. 은대봉을 지나니 철쭉나무 숲으로 대간길이 이어 졌으며 나무들로 키는 작지만 천년의 세월을 이겨낸 힘찬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철쭉 군락지대를 지나고 급경사를 이루며 싸리재로 급히 내려가고 있었다. 눈도 쌓여있고 대간 길은 미끄러워 얼지 않은 길을 택하여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다 내려오니 철책으로 큰문을 만들어 놓고 산불조심 산길을 통제하고 있었다. 싸리재 일명 두문동재 이곳은 태백에서 고한의 두문동으로 통하는 재로써 그 높이가 1260m로 우리나라 국도가 통과하는 곳으로는 제일 높다 고하니 민 항재와 나란히 제일 높은 재가 여기에 다 모여 있었다. 두문동재는 밑으로 두문동 터널이 뚫리면서 이곳은 통행량이 거의 없고 옛날 정취를 느껴 보려는 몇몇 사람들이 올라와 쉬어가곤 한다고 한다.

두문동은 원래 북녁땅인 개풍군 함덕산 서쪽기슭에 있었는데 두문동 72현으로 불리는 임선비, 상사재, 조의생등 72명의 고려유신이 조선을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곳이라 한다. 태조가 회유를 권하였지만 나오지 않자 화가 난 태조가 이곳에 불을 질러 생명을 빼앗았으며 몇몇 사람은 이곳을 빠져 나와 이곳 고을에 흘러 들어 자리잡고 두문동이라 칭하며 살아서 두문동이라는 지명이 생겨 났다 하며 임금이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하며 두문불출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한다. 옛날 선조의 지조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 진다.

(두문동재- 금대봉) (13:05~14:05)
두문동재 바로 지나 넓고 관리가 잘된 헬기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에서 싸온 주먹밥과 반찬을 내 놓으니 진수성찬이다. 산지기님은 버너를 꺼내 라면을 끊인다 하여 그냥 점심만 먹고 가자고 만류하고 맛있는 점심을 먹고 반주도 한잔 곁들였다. 바로 베낭을 꾸려 금대봉을 향하였다. 높은 봉우리는 보이지만 방화선 길은 잘 나있어 이곳을 따라 올라가다가 다시 숲속 길로 접어들어 숨이 턱에 다을만 하니 금대봉에 도착하였다. 금대봉 봉우리는 양강 발원지 대덕산 금대봉이라 써져 있었다. 이곳 금대봉 동북쪽에 검룡소가 있어 이것이 한강 514km의 발원지를 이루고 동남쪽으로 태백의 황지 연못이 있어 이곳의 무진장한 수량이 물줄기를 이루어 1300여리에 달하는 낙동강의 시발점이라 하여 양강의 발원지라 한다. 한강 발원지인 검룡소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는데 서해에 사는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 이곳이 가장 먼 상류의 연못임을 알고 이 연못에서 살았다 한다. 그러나 인근의 소가 물을 먹기 위해서 이 검룡소에 왔는데 그만 그 소를 잡아 먹어 버렸다. 이에 분노한 인근 주민이 못을 메워 버렸다는 것이다. 이 못은 다시 1986년 한강 발원지 임을 확인하고 복원하였다고 한다.

(금대봉- 비단봉) (14:05~15:00)
금재봉 검룡소의 전설을 뒤로하고 방향을 우측으로 90° 꺽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대간 길은 눈이 녹아 질척거렸으며 간간히 얼음판을 이루어 미끄러웠다. 앞서가는 산지기님은 대간 길은 조금도 벋어나지 않으려고 질척거리지 않고 미끄럽지 않은 대간길 가장자리를 골라 밟고 간다. 대간길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님의 발자국이 너무 아름답다. 나도 되도록이면 산길이 아니면 산을 침범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해 본다. 완만한 경사 길에 대덕산 금대봉이라는 하얀 플라스틱 팻말에 300m 마다 하나씩 꽃혀 있어 길을 잃을까 조바심하는 우리에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멀리서 비단봉의 하늘을 찌를 듯이 뽀족한 봉우리가 눈앞에 들어온다. 경사가 급할 것으로 생각되어 ‘비단봉의 깔닥고개로 넘어야 하는군’ 하며 생각을 다잡아 보면서 의지를 불태운다. 비단봉 바로 밑 쑤아밭령에는 용연 동굴로 가는 팻말과 함께 커다란 물푸레 나무가 있어 잠시 땀을 식히고 가라고 손짓한다. 이렇게 커다란 물푸레 나무는 처음인 것 같다. 밑동을 보면 물푸레 나무인지 잘 모르겠는데 위에 뻗은 가지는 줄기에 하얀 반점을 가지고 물푸레 나무가 틀림없다. 잠시 땀을 식히고 비단봉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3번의 오르막이 있고 마지막에 급경사를 이루며 암봉이 나타나고 암봉을 막 올라 서서 마지막 바위에 올라서니 전방이 탁 트인다. ‘아 가장 힘든 코스는 끝냈구나’ 하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뒤로는 함백산의 당당한 위용과 그곳에서 쭉 이어지는 중함백, 은대봉, 두문동재, 금대봉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며 그 장쾌한 맛에 대간의 아름다움을 세삼 다시 한번 깨우쳐진다. 이곳 이름이 비 단봉 이란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전망이 있어서 인가’ 하고 생각해 본다.

(비단봉 – 매봉산(천의봉)) (13:00~15:45)
다시 발길을 서둘러 내려가니 앞에 고령지 채소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산을 다 내려와 밭을 가로질러 자재보관 하우스 앞으로 농로에 접어 들었다. 앞으로는 밭 가장자리로 산이 보이며 그곳으로 대간 길이 이어져 있었다. 넓고 크게만 보이던 고령지 밭에 직접 들어와보니 잔 자갈이 숫하게 많았으며 어떤 밭은 거의 자갈 밭과 같이 온통 돌로 뒤 덮혀 있는 밭도 있었다. 그곳에는 힘든 농부의 피와 땀이 베어있어 마음이 아려왔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다지도 힘들고 거칠단 말인가! 이 높은 산꼭대기 까지 척박하고 거친 땅을 옥토로 가꾸어가는 농부의 힘든 어깨를 생각하며 고냉지 밭을 빠져 나왔다.

농로와 시멘트 길로 와서 우측으로 꺽어 산으로 다시 접어들었다. 산이 밋밋한 것 같지만 상당히 힘이 들었다. 군사교통로와 헬기장을 두어 번 지나 종간봉우리가 하나 나오고 그곳에서 한 15분 정도 올라가니 매봉산(천의봉)(1303m)이 나온다. 7시간 빠른 걸음으로 걷다 보니 산지기(별명:황노루)님의 발걸음을 쫓다 보니 숨은 가쁘고 이제 몸 속의 에너지는 다 떨어져 가는지 힘이 들기 시작했다. 산 기지님 만 빼고 나머지 대원은 속으로 자신들과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매봉산 정상에는 교통로와 산불 감시초소, 송신 안테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 매봉산은 2가지의 큰 의미가 있는 산이다. 이 곳을 기점으로 낙동정맥이 뻗어 백봉산- 통고산 – 백암산 –은주산-가지산- 취하산- 금정산- 구덕산을 이어 부산 다대포 몰운대어서 맥을 다하는 낙동정맥의 시발점이 되면 또 하나는 삼수령, 즉 한강, 낙동강, 오십천의 3가지 물줄기를 이루는 시작점이 된다고 한다. 잠시 쵸코파이(오리온) 하나씩 나누어 먹고 마지막 피재로 향하여 내려갔다. 밭을 가로지르고 조그만 봉우리를 넘고 교통로와 산병호 진지를 지나 다시 숲속으로 들어갔다. 조금 내려오니 부산 건전산악회에서 새운 낙동정맥 갈림길 팻말이 스테인레스 철재로 새겨져 있었다. 고마운 분들이었다. 우리는 대간길을 찾아 예수원 목장을 지나 피재를 내려왔다. 대간길의 한 구간 종주를 마감하는 것이었다. 총 7시간 53분이 소요되었다. 김태형 부인께서 차로 마중 나와 계신다. 서로 수고의 악수도 나누고 가슴속에 솟아오르는 벅찬 감정을 자제하면서 막걸리 한 사발에 아쉬운 작별은 고하며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