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신의 도시에서 신의 무덤으로 - 따프롬과 앙코르 톰② 무진당 조정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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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바이욘사원 안내도
바이욘사원은 어떤 모습일까 정말 궁금했는데 너무나 쉽게 도착했다. 바이욘사원에는 대문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신들의 도시 한 중앙에 지어진 사원인데 굳이 무슨 대문이 필요하겠느냐는 자신감. 왕을 모시는 왕비의 침소인 창경궁의 통명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왕이 곧 하늘이고 지붕이기 때문에 굳이 용마루가 필요없다는 뜻이다. 여기도 그런 걸까. 알고 보니 바이욘 사원은 우유의 바다젓기의 젓대막대의 중심축 역할을 하기 때문에 외부의 담이 필요없었다고 한다. 아하, 그렇다면 이곳은 비슈누신에게 바쳐진 사원이겠구나. 그러나 자야바르만7세는 불교도였다. 3층 중앙 성소에는 불상이 안치되었다. 비록 13세기에 힌두교도들에 의해 우물 속에 버려졌지만. 또한 중앙의 밀실은 인도의 원형 사리탑을 모방하여 원형으로 세워졌다. 그렇다면 불교사원이다. 그러나 바이욘사원은 후대의 왕들에 의해 새로운 건물이 첨가되고 여러 차례 개축되어 본래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남문에서 바이욘사원까지 톡톡이를 타고 한참을 달려오느라 대문을 지났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바이욘사원의 표현법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만큼 감동적이었다. 미사여구 다 빼고 살집 다 들어내고 핵심만 골라서 들려주는 듯한 충족감. 그것이었다.
바이욘 사원 역시 정사각형 구조에 2개의 회랑으로 둘러쳐져 있고 3층으로 되어 있다. 외부 회랑은 156m×141m, 내부 회랑은 80m×70m이고 3층 중앙에는 25m높이의 원형산괴로 놓여 있다. 외부회랑에는 크메르군과 이민족간의 전투장면을 비롯하여 일상생활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동맹국들이 크메르에 원정 오는 모습, 걸핏하면 크메르와 칼을 부딪쳤던 참족들의 모습, 앙코르를 재탈환하는 자야바르만7세의 용감한 모습 등 당시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전쟁사를 부조로 볼 수 있다. |
외부회랑 부조
그 전쟁 와중에도 불을 피워 밥을 하고 전쟁터로 나가는 장성한 자식에게 밥을 먹이고 막간을 이용해 닭싸움을 시키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악어가 득실거리는 배 위에서 싸움을 하고 점포에서 물고기를 팔고 부서진 사원을 수리하기 위해 돌을 다듬는다. 어디 그뿐인가. 산파는 산모를 도와 아기를 받고 천막 안 여인은 머릿속의 이를 잡고 길거리의 남정네는 장기를 두고 부억에서는 냄비에 물을 끓인다. 역사책이 필요없는 생생한 앙코르의 역사이다. 내부회랑은 원래 수행자들에게만 출입이 허용된 신성한 지역이었다. 그러니만큼 벽면에는 수행자들의 수행모습과 시바와 비슈누 등 신들의 모습, 그리고 왕과 관련된 내용이 새겨져 있다. 곧 왕과 수행자와 신은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우유의 바다젓기 신화, 팔이 넷 달린 비슈누신과 화려한 춤을 추는 압살라. 코끼리를 타고 왕궁을 나서는 왕의 행렬. 뱀의 독 때문에 문둥병에 걸렸다는 자야바르만7세의 전투장면. 이곳은 이곳대로 또 사람 사는 세상이다. 신들조차 사람같은 신들이다. |
바이욘의 여신-내부회랑
압살라2-내부회랑
드디어 3층이다. 내 키보다 두 배나 높은 얼굴상과 마주쳤다. 놀라서 주저앉을 뻔 했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닌 수십 개의 얼굴이 앞뒤 옆 사방에서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놓여져 있을 때의 당혹감. 지상에서 정상까지의 높이는 43m로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지만 2m가 넘는 인면탑이 37개나 세워져 있어(처음 지었을 때는 214개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함) 바이욘 사원은 신비스럽고 웅장하기 그지없다. 여러 개의 돌을 따로따로 조각해서 퍼즐조각처럼 쌓았기 때문에 눈, 목, 귀나 장신구등이 좌우가 조금 다르게 표현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넓은 이마에 반쯤 감은 눈, 그리고 입꼬리가 올라간 두툼한 입술 등은 신성함과 고귀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 최전성기의 앙코르왕조의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있다. 나는 미로 속을 헤매이듯 인면탑 사이를 빙빙 돌아다녔다. 그리고 침묵했다. 워낙 거대한 존재와 대면했을 때 느끼게 되는 침묵. 육중한 침묵이 바위보다 더 육중하게 사원을 덮었다. 침묵 사이로 찌를 듯 내리 꽂는 태양도 사라지고 시간도 사라졌다. 사원 곳곳을 구경하던 사람들의 탄성과 감탄사도 전부 사라졌다. 오직 나와 인면탑만이 남았다. |
바이욘사원
탑속의 신들은 맨 처음 샴쌍둥이 같은 얼굴을 하고 그 자리에 섰던 그 모습 그대로 다시 내 앞에 서 있었다. 어디선가 꽃향기가 흘러나왔다. 지상에서는 결코 맡아본 적이 없는 향기로운 냄새였다. 그러자 사원 기둥 뒤에 숨어있던 여신들이 나와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머리에 금빛 찬란한 황금관을 쓰고 하늘거리는 붉은 치마를 걸친 여신들이 맨발의 춤을 추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구부리며 발동작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몸을 움직였다. 나도 그들 속에 섞여 춤을 추었다. 시간이 멈추었다. 공간도 멈추었다. 춤 속에는 오직 영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유토피아가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이리라. 끝없이 밀려오는 안락과 향기만이 흘러다니는 곳. 이곳은 어떤 고통도 비극도 용납되지 않는 끝없는 열락의 세계. 천상이 있다면 이런 곳이리라. 이곳이 극락이고 파라다이스고 무릉도원이었다. 사람들이 앙코르의 미소라 부르던 인면탑 속 신들이 미소를 지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의 미소였다. 신성하고 아름답고 거대하고 숭고해보였지만 앙코르의 멸망을 내다보는 측은함의 미소였다. 꽃향기 대신 어디선가 피 냄새가 났다. 그러자 여신들의 환영은 사라지고 현실이 펼쳐졌다. |
폐허가 된 사원 뒤편
자야바르만7세가 바이욘 사원을 건립한 지 100년쯤 지나서 앙코르는 망한다. 앙코르가 망하게 된 원인은 태국의 침략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대한 적이 쳐들어온다해도 이런 거대한 문명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저력을 가진 민족이 외적의 침입에 그렇게 쉽사리 무너질 수는 없다. 앙코르는 결코 태국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었다. 멸망의 원인이 외부에 있지 않다면 결국 내부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원인은 바로 자야바르만7세에게 있었다. 그는 마치 오늘 배부르기 위해 내년에 심을 종자까지 다 먹어버린 어리석은 농부 같았다. 그의 재세 기간 동안 끊임없이 계속된 광적인 공사로 인해 백성들은 지쳤고 재원은 바닥났다. 사람들은 굵어죽기 시작했고 질병이 난무했다. 결국 국토는 황폐해져갔다. 그는 그의 사후 백 년 동안 살아야 될 후손들의 식량과 물을 다 먹어치워버린 셈이고 종자까지 삶아먹어버린 꼴이었다. 수많은 보물과 예술품은 물론이고 건축가, 조각가, 무희, 백성 등 총 6만 명의 포로가 태국으로 끌려갔다. |
바이욘 사원에서 내려가는 문
이곳은 원래 불교사원이었다
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끄는 왕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자신은 옳고 백성들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신을 대리하는 왕이고 절대권력자인 만큼 나의 뜻은 곧 신의 뜻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옳다. 앞서간다. 만약 백성들이 나의 뜻에 반대한다면 그것은 내 생각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들이 어리석기 때문이다. 나는 백성들을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생하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당연히 나를 따르고 지지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백성이라면 엄하게 채찍질로 다스려야 한다. 설령 지금은 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을 한다해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내가 옳았다는 것을.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의 의견 같은 것은 무시해도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리석기 때문이다. 왕이 일단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때부터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오로지 멸망의 지름길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것만이 남을 뿐이다. 결국 자멸하는 것이다. 따라서 멸망은 항상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어찌 왕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겠는가. 역사를 되풀이하며 독재자들이나 개인에게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공통된 현상인 것을. 그러나 개인의 파멸이 한 사람의 실패로 끝나는 것에 반해 한 나라의 지도자의 판단 잘못은 그 국민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는다는 점에서 그 문제의 심각성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앙코르 왕조의 멸망에는 자야바르만7세의 무모함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여기에 뒤이은 왕들의 통치능력의 상실도 한 몫했다. 통치능력의 상실은 곧 저수지와 운하의 유지를 어렵게 했고 용수 공급의 부족은 벼농사에 치명적이었다. 농업 국가에서 자신을 신과 동일시했던 왕들의 절대권력이 칼과 채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물이었음을 어리석은 왕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백성들이 목이 마르면 왕 또한 언젠가는 목이 마르게 될 거라는 걸 알지 못했다. 같은 땅에서 사는 사람은 왕과 백성이 모두 같은 운명을 타고난 동업중생이 다.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프듯 너와 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앙코르는 태국이 침략하기 이전에 이미 내부적으로 스스로 썩고 있었다. 여기에 태국이라는 강한 태풍이 몰아치자 빈 껍데기 뿐인 앙코르 왕조가 와르르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런 앙코르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정복자 태국은 피정복민들에게 안식과 평화를 약속했고 오랜 굶주림과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정복자를 받아들였다. 백성들은 배고프게 하는 돌덩어리속의 신들보다 정복자든 누구든 배부르게 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후세계의 약속보다 우선하는 것은 현실세계의 밥이었고 밥을 주는 사람이 앙코르의 왕인지 이민족의 왕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
바이욘사원 원경
그러므로 자야바르만7세는 앙코르의 영광을 아낌없이 보여 준 마지막 왕이었음과 동시에 앙코르를 사지로 몰아넣은 원인제공자였다. 이런 앙코르의 미래를 아는 지 모르는 지 40년 동안 왕좌를 지킨 자야바르만 7세는 90세가 넘을 때까지 장수하다 바이욘사원에 안치되었다. ‘방’이라는 뜻의 바이욘은 자야바르만 7세의 무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00년 후 신의 도시였던 앙코르는 신이 무덤이 되었다. “앙코르와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사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거기로 갈까요?” 바이욘 사원 근처에 있는 왕궁과 사원 몇 군데를 더 둘러보고 나서 지친 내가 가이드에게 말했다. 가슴이 조금 답답했다. 며칠 동안 사원과 열대림 속을 헤매이고 다녔지만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했을 때의 답답함이 느껴졌다. 특히 한국 사람들처럼 산이 많은 지역에 산 사람들은 나와 같은 증세를 느낄 것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산 아래 동네를 내려다 봐야 동네 전체를 알 수 있도록 자란 사람들만이 느끼는 답답함이다. 남산타워에 올라가서 서울 시내를 둘러보아야 속이 후련한 것처럼 이젠 나무숲과 돌숲을 벗어나 앙코르의 전체 모습을 보고 싶었다. 특히 한국의 전통회화에서 그림을 그릴 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각인 조감도법을 쓰게 된 것도 이런 산동네 사람들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코끼리 테라스
코끼리 테라스2
승리의 길을 향해 나 있는 코끼리 테라스
문둥왕 테라스의 문둥왕
쁘레아칸 동문앞의 악신들
그 때까지 가이드는 점심 때 사 준 생수를 뚜껑도 따지 않은 채 들고 있었다. 나는 더위에 헉헉거리는데 그는 전혀 덥지 않은 표정이었다. 더위도 훈련하면 덥지 않을까. 나는 과묵한 가이드에게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영어표현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나도 과묵한 게 최고다. 과묵한데다 목소리까지 작은 가이드는 가이드로서는 최악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최고였다. 묵묵히 가야할 길을 안내할 뿐 곁에서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오롯이 나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놈 바케잉.” 잠시 잊고 있었다. 그 곳을. 앙코르 평야에서 유일하게 우뚝 솟은 산. 그래봐야 높이가 67m밖에 되지 않는 낮은 산이다. 그러나 전체가 낮은 평지인 앙코르에서 바케잉 산에 오르면 내가 지금까지 부분 부분 보았던 앙코르를 한 눈에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을 마무리하는 순간에 선택을 잘 한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산악지대에 사는 나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프놈 바케잉 입구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수리가 끝났다고 가져온 차 안에서 시원한 에어콘 바람에 땀이라도 좀 식혀볼까 했는데 벌써 다 왔다고 했다. 프놈 바케잉은 앙코르왕조의 세 번째 왕이었던 야소바르만1세(889-915) 때 지어진 사원이다. 아버지의 유훈을 따라 인도의 큰 도성과 자바의 보로부두르사원 같은 거대한 사원을 짓고자했던 왕.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위엄 있는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던 그는 그러나 문둥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앙코르에서 문둥병은 아주 흔한 병이었다. ‘중앙의 산’이란 뜻의 ‘프놈 바케잉’은 앙코르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사원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사원에 관심이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은 사원을 본 뒤라서 용량이 초과된 셈이다.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였다. 그저 쉬고 싶었다. 그래도 끝까지 프놈 바케잉을 찾은 것은 순전히 대한민국 아줌마의 기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승길 가는 것도 아닌데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항상 그랬다. 여행을 떠날 때는 늘 그랬다. 여기 오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 그러니 어찌 소홀히 볼 수 있겠는가. 그다지 험한 산은 아니었지만 더위에 지친 탓에 올라가는 길은 힘들었다. 그런데 사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더욱 힘들었다. 올라가서 보니 세상이 달라보였다. 내가 사흘 동안 열에 들떠 돌아다녔던 앙코르가 나무숲 사이로 잠겨 있었다. 높은 건물 하나 없이 편편한 평원 저 멀리 둥근 지평선이 보였다. 아, 그렇지. 지구가 둥글었지. 새삼스러운 발견. 넓직한 사원 위에 각 나라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갈색피부의 아시아인과 노란머리의 유럽인들과 귀걸이를 한 동남아시아인과 배낭을 맨 한국인들과 검은 선글라스를 낀 러시아인과 샌들을 신은 미국인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같은 장소에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낯익고 친근한데 서로는 각자의 언어를 쓰고 있었다. 낯선 언어들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도시의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사원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바벨탑의 전설이 생각났다. 인간이 오만하여 하늘에 이르는 탑을 만들려고 하자 신이 인간들의 언어를 서로 틀리게 하여 소통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전설. 그래서 바벨탑은 무너지고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시작되었다. 이제 바벨탑은 무너지는 걸까. 아니다.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성경속의 바벨탑은 무너졌어도 이 곳 신전에 모인 사람들이 세운 탑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만든 탑은 하늘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어둠을 밝혀주는 탑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인연으로 그 먼 길을 달려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앙코르와트의 가장 높은 신전에서 함께 노을을 보는 걸까,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언젠가 한 번은 나와 한 이불을 덮고 살았을 법한 사람. 과거 한 생은 같은 밥상머리에 앉아 서로의 숟가락 위에 반찬을 얹어주며 얘기했을 듯한 사람. 또 과거 한 때는 창문 밖으로 눈이 내리고 매화꽃이 피는 것도 잊고 서로가 등을 돌리고 앉아 면벽수도를 했을 것 같은 인연. 그 모든 인연들이 여기 모여 있었다. 그런데 과거의 애틋한 기억도 망각한 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서로 다른 피부를 하고 태어나 그 기억을 잊었구나. 그 깊은 인연 때문에 오늘 이 곳에 다시 모인 줄도 모르고. 우리가 오늘 여기서 만난 인연으로 또 언제 어디서 다시 옷깃이 스칠까. 서로가 그렇게 귀한 인연인지도 모르는 체 만났다 헤어지겠지. 그것이 인생일까. 아아. 무심한 사람들아. |
프놈 바케잉에서 바라본 앙코르
프놈 바케잉의 탑
신의 도시 위로 노을이 지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서서히 사원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겨우 발뒤꿈치 넓이의 폭이 좁은 계단을 내려가자니 발을 옆으로 돌리고 윗 계단을 두 손으로 짚고 내려가야 했다. 이제 사원을 올라오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대여섯 명이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산길은 전부 내려가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내려가는 사람들 모두 말이 없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뒤섞여 약속이나 한 듯 발을 맞추어 내려오는 모습.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함께 걸어가는가. 점점 어두워지자 이 신비한 도시는 녹색과 붉은 색 옷을 벗고 상복 같은 검은색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인간의 시간이 끝나고 귀신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신의 제단에서 지상의 불빛을 찾아 내려가는 사람들 곁으로 끌과 망치와 톱을 든 귀신들이 올라가고 있는 것을. 내려가는 사람들과 올라가는 귀신들 모두 말이 없었다. 오직 땅만 보고 걷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산 사람과 귀신은 쉽게 구분되지 않았다. 다만 가는 방향이 다를 뿐이었다. 태양이 눈부신 낮 동안 음습한 사원 구석에 숨어 있던 귀신들은 자신이 망치질을 멈추었던 지점으로 돌아가 망치를 들 것이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도 모른 채 죽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밤새 망치질을 할 것이다. 그들과 비껴가면서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중얼거렸다. “돌을 짊어진 채 정글 속에서 죽어간 영혼들이여. 이제 그만 잠드시라. 부러진 돌조각 아래 쓰러진 그대 열매 속에 독한 꽃 핀 무화과로 헌화하였으니 사원의 모서리에 돌덩이 하나 놓일 때마다 비틀거리던 노예의 죽음 더하였나니 저녁 해가 떨어질 때 마른 비명 잦아들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절규의 기도 소리 울려 퍼졌구나. 신을 모신 사원에는 신조차 외면한 영혼들이 천 년의 세월동안 울부짖었나니 그대 이제 그만 잠드시라. 우리 모두 빈 손으로 왔다 빈 손으로 가거늘 그대 손에 쥐어진 원한과 분노를 내려놓고 편안히 가시라. 그대 가시는 길 행여 넘어질까 봐 진리의 밝은 등불 비추이나니 그대 편히 가시라. 돌을 나르다 죽게 한 자야바르만 7세여. 그대도 편히 잠드시라. 자신이 목적한 바를 위해 백성들을 희생시키며 그것이 신의 나라를 위한 길이라 여겼던 어리석은 그대여. 그대 또한 후세의 위정자들에게 권력의 오만함과 허망함을 일깨웠나니 그대의 영혼도 편히 쉬시라. 용서와 자비만이 그대들의 저승길을 밝혀주리니 불쌍한 그대들 편히 가시라.” 거대한 행렬 속에 파묻혀 산 아래 도착했을 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물결처럼 내려오는 사람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무거운 연장을 짊어진 채 힘겹게 올라가는 귀신들의 행렬도 끝이 없었다. |
기억속의 앙코르와트
그 때였다. 삶과 죽음이 만나고 갈라지는 지점에 서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별해내기 위해 애를 먹고 있을 때 산을 향해 올라가는 귀신 중 하나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가 누구인 지 알 수 없었다. 자야바르만7세 같기도 하고 사원 모퉁이돌에 깔려 죽은 노예 같기도 하고 두 사람의 얼굴을 합쳐 놓은 것 같기도 했다. 그들 모두 자신들의 애착과 원한이 맺힌 장소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를 향해 합장하며 이렇게 말했다.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타야 훔”
(끝) |
앙코르와트에서 필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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