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로 떠나면서
무진당 조정육
백자고무신께.
여기는 인천공항대합실입니다.
저는 지금 캄보디아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가야겠다고 열망해왔던 의무를 이행하듯 저는 갑자기 가방을 챙기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 열망이 어디서부터 오는 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주말이면 배낭을 매고 탑과 불상을 찾아 떠나던 습관이 여기까지 저를 오게 한 것 같습니다.
혼자서 비행기표를 사고 짐을 부치고 출국심사대에 섰습니다. 여지껏 단체여행만 다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앞섭니다. 영어방송이 나오고 낯선 외국어자막이 뜬 전광판을 보면서 저는 세상을 향해 처음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어린아이처럼 뒤뚱거리며 긴장해있습니다. 사십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문밖으로 나갈 용기를 가졌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또 한편으로는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결행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나선 여행입니다. 여행사에 전화를 했을 때 무조건, 막무가내로 가야 되겠다는 생각이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공항에 왔습니다.
이틀 전에 보내드린 ‘동양미술 에세이’의 3권 원고 수정본은 잘 받으셨는지요? 오늘 여행을 떠나기 전에 원고와 그림스캔을 정리해서 보내드리려고 저는 이틀 낮과 이틀 밤을 꼬박 지새웠습니다. 토요일 아침부터 시작한 작업이 일요일을 지나 월요일 새벽 4시에 끝났을 때 비로소 여행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세 번째 책 원고를 보내드리고 나니까 비로소 10년 여행계획의 중반을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1권)와 『거침없는 그리움』(2권), 그리고 이틀 전에 넘겨드린 3권의 원고는 주로 그림과 관련된 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쓰게 될 4권은 그야말로 현장에서 직접 본 동양미술을 소개하는 글이 될 것입니다. 아마 조각과 건축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겠지요. 4권이 끝나면 동양미술을 넘어 서양미술까지 아우를 수 있는 동서양미술의 교류에 관심을 가져볼 계획입니다.
사람의 일이란 참 신비스럽습니다. 처음에는 사소하게 시작한 일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움직여가는 생명체 같으니 말입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슬픔에서 시작된 글 여행이 10년 계획이 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으니까요. 글이라는 형식을 통해 저의 사소한 일상을 얘기하기 시작한 지 벌써 6년이 지났습니다.
글을 쓰면서 울먹였고 글을 쓰면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웃었고 글을 쓰면서 어둠을 받아들였습니다. 글을 쓰면서 울었던 시간은 단순한 통곡을 넘어 영혼이 정화되는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글은 기도이고 참선이고 축복의 시간입니다. 이른 새벽 도량석을 하는 스님의 아침종성이고 밤새 불 꺼지지 않는 낡은 교회의 간절한 기원입니다.
그것은 또한 밤새 강물이 얼지 못하도록 부리로 수없이 얼음을 깨뜨리는 작업이고, 장마철에 끝없이 자라나는 너른 들판의 억샌 풀을 뽑아내는 과정입니다. 새가 작은 부리로 강물의 얼음을 깨뜨릴 때 그 몸짓은 얼마나 가망 없어 보이던지요. 뽑아도 뽑아도 눈만 뜨면 쑥쑥 자라나는 장마철의 풀은 얼마나 질기고 완강해보이던지요. 그래도 그 몸짓을 멈출 수 없고 풀을 뽑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글 쓰는 자의 의무라 생각합니다.
부질없어 보이는 몸짓으로 얼음을 부수고 풀을 뽑는 사이 세상속의 시간은 절로 흘러갔습니다. 책가방을 챙겨줘야했던 아이는 어느 새 우뚝 자라 코밑에 거뭇거뭇한 수염이 났습니다. 그 곁에서 저의 머리카락은 색이 바래고 훵해졌습니다. 불같은 성질의 시아버지는 주말마다 전화를 드려야 어린애처럼 안심하는 힘없고 노쇠한 할아버지가 되었고 시댁의 거실 형광등은 더욱 희미해지고 흐려졌습니다. 언젠가 그 낡은 거실에 등이 구부러진 제가 앉아 있겠지요.
세월은 저의 곁에서 강물처럼 왔다 흘러갑니다. 저의 시간도 이 지상에서 강물처럼 왔다 금새 흘러가겠지요. 그렇게 흐르고 흘러 바다에 가 닿을 때쯤 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두렵고도 무서운 일입니다.
4권을 시작할 때면 그 첫 번째 글 여행이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왜 굳이 앙코르와트여야 하는 지, 저는 알 지 못합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데 이유가 없듯이 앙코르와트를 향하는 저의 마음 또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지금의 저의 심정은 오랜 세월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연인을 만나러 가듯 떨리고 조바심이 납니다. 가서 어떤 느낌일 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실망을 할 지 감동을 할 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면 어쩌나, 혹은 너무 황홀해서 지금껏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던 나의 것이 하잖아 보이면 어쩌나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젠 출발합니다. 실망을 하든 감동을 하든 부딪쳐 볼 생각입니다.
굳이 이 편지를 4권의 머릿글이 아니라 3권의 후기로 덧붙이는 것은 하나의 끝맺음은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6년 동안의 여행은 끝났지만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다녀와서 다시 소식 띄우겠습니다.
하늘 저 멀리 앙코르와트의 불빛이 보이는 듯합니다. 이제 떠납니다.
(2008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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