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사라진 두 시간-앙코르 속으로
무진당 조정육
드디어 왔다. 내가 앙코르와트에 오다니...
인천공항에서 저녁 7시 20분에 출발한 비행기가 시엠립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현지시각 10시 45분. 5시간 비행을 했는데도 현지에 와 보니 3시간 지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한국은 지금 12시 45분이라고 했다. 비행기속에서 증발해버린 두 시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사라진 두 시간 속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 사이 비행기는 시골 간이역같은 시엠립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울창한 열대나무들이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5시간 안에 영화속에서나 볼 수 있는 열대나무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정말 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내가 앙코르와트에 와 있었다. 처음으로 와 본 전설속의 도시. 앙코르와트. 드디어 전설이 현실이 되었다.
공항에 나온 가이더의 안내를 받고 호텔에 도착해서도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둠이 걷히고 나면 만나게 될 전설의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설레임과 기다림으로 잠이 오지 않아 한국에서 가져온 캄보디아에 대한 책을 읽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남서쪽에 위치한 캄보디아는 크메르족 국가이다. 인도계 왕국인 후난에서 시작된 크메르는 500년 전후 메콩강 하류지역에서 번성하게 되었다. 이 때를 후난국시대(1세기 말- 6세기 중엽)라고 한다. 이들은 불교와 힌두교를 신봉하였고 해상교역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후난국은 6세기 후반에 북쪽에 인접해 있던 진랍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진랍국시대(6세기 후반-8세기말)가 시작된 것이다. 연합국가였던 진랍국은 산보르 프레이 쿡크(고대명은 이샤나프라)를 수도로 하여 이샤나바르만1세(616-628년) 때 전성기를 맞이한다. 전앙코르기라고 불리우는 진랍국시대는 후난국시대 말기의 미술을 계승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었다. 벽돌로 쌓은 상자형 탑당은 상부를 피라미드형으로 쌓는 캄보디아의 독특한 사당 건축의 선구가 되었다. ‘프라사트’라 불리우는 고탑형 사당 건축은 앙코르시대에 완성된다. 진랍국은 705년 경에 분열되어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결국 8세기 후반에 인도네시아 자바에 있는 샤일렌드라 왕조에 의해 망하게 된다. 이 샤일렌드라 왕조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보로부두르 사원을 세운 바로 그 사람들이다. 여기까지가 앙코르와트가 세워지기 전까지의 캄보디아 역사이다.
앙코르의 역사는 자야바르만 2세(790-835년)로부터 시작된다. 자바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야바르만 2세는 802년 수도를 앙코르로 옮기고 신왕조를 선포하였다. 힌두교와 불교를 위해 사원 건축이 건립되고 조형활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의 조형활동의 흔적은 앙코르지역을 넘어 타이 동부, 라오스 남부, 베트남 남부에서까지 확인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펼쳐졌다. 이들 작품은 불교와 관련된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힌두교에 속한다. 특히 국왕이 신봉하는 신을 왕국의 최고신으로 숭배하는 신왕(神王:Deva Raja)신앙은 앙코르 왕조 초기부터 확립되었다. 최고신은 힌두교의 시바신과 비슈누신 그리고 불교의 붓다가 추앙받았다. 국왕은 최고신의 화신으로 사후에는 최고신에게 귀일한다는 것이 신왕신앙이다. 신왕신앙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국가 정책이었다. 왕은 스스로를 우주의 지배자라고 가르쳤고 신처럼 행동했다. 이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앙코르는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불가사의할 정도로 찬란한 문화를 일궈낸다. 특히 스리야바르만 2세(1113-1145 재위)가 건설한 앙코르와트와 자야바르만 7세(1181-1219년경 재위) 때 세운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미술의 백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러 이민족들의 침략을 끊임없이 경험해야 했다. 1177년에는 베트남 남부에서 형성된 참파왕국이 침입하여 앙코르와트를 파괴하였다. 결국 13세기 중엽에 태국의 침략으로 앙코르 왕조(802-1431년)는 멸망하게 된다.
멸망 후 앙코르의 수많은 기술자와 학자들이 태국의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태국문화의 캄보디아화가 진행되었다. 찬란했던 도시 앙코르는 태국의 지배로 열병이 창궐하게 되었고 폐허처럼 버려졌다. 결국 집권층은 앙코르를 포기하고 수도를 남쪽 항구인 프놈펜으로 옮긴다. 이후 앙코르와트는 400년간 정글 속에서 폐허로 남아 있게 되었고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의 각축장이 되었다.
태국의 영토였던 앙코르가 다시 캄보디아로 편입된 것은 1907년 프랑스의 도움에 의해서였다. 비록 앙코르가 캄보디아의 영토가 되었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프랑스 식민지로서의 캄보디아였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한 프랑스 식민지에서 캄보디아가 독립한 것은 1956년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캄보디아의 고난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강대국이 개입한 내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1970년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놀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자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시아누크는 중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는 론놀을 몰아내기 위해 크메르루즈의 폴포트와 손을 잡는다. ‘붉은 크메르군’이라는 뜻의 크메르루즈는 공산 크메르인을 의미했다. 시아누크는 폴포트를 끌어들여 론놀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이는 여우를 쫓아내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들인 격이었다. 공산세력이었던 폴포트는 친중국 정책을 표방하며 정권 장악을 위해 수많은 지식인과 양민들을 학살했다. 이것이 바로 ‘킬링필드’로 불려졌던 홀로코스트였다. 이 기간동안 150만명이 죽어나갔다.
그러자 시아누크는 폴포트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이번에는 베트남의 호치민을 끌여 들였다. 1979년 호치민이 이끄는 월맹군에 의해 폴포트 정권은 북쪽 정글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월맹군은 본국으로 쉽게 돌아가지 않고 섭정을 했다. 1986년 유엔의 개입으로 겨우 물러나게 되었다. 물러 날 때도 곱게 물러나지 않았다. 캄보디아의 영토 일부를 떼어간 것이다.
캄보디아는 1993년부터 훈센 총리를 중심으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고 관광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 관광산업의 중심에 앙코르와트가 놓여있다. 그러나 오랜 내전으로 황폐하게 된 캄보디아에 안정과 번영이 정착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아 보인다. 이것이 대략적인 캄보디아의 역사이다. 새벽이 되면 만나게 될 앙코르의 역사이기도 하다.
2000년이 넘는 캄보디아의 역사 중에서 앙코르 시기만이 유일하게 빛나는 시기였다. 그런데 왜 앙코르는 망하게 되었을까. 600년 이상을 한 곳에서 찬란한 문화를 이룬 앙코르는 왜 정글의 폐허로 남게 되었을까. 정말 앙코르와트는 사진에서 본 것처럼 실물 또한 감동적일까.
6백년 이상 된 왕조가 망하게 된 원인은 단순히 이민족의 침략만은 아닌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찾을 것이다.
이런저런 의문점과 흥분 때문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 못 이루는 길손에게 밤은 길다고 하던가. 캄보디아에서 보낸 첫날은 그렇게 길었다. 나는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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